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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01:15

[나운택]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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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를 잊어버렸어.”

“제니!  … 미안해.”

“아니야. 사랑은 결코 미안하단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올리버! 도와주고 싶다.”

“제니는 이미 죽었어요.”

“미안하구나.”

“사랑은…  사랑은 결코 미안하단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1970년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러브스토리>에 나오는 두 장면이다. 에릭 시걸의 원작 소설이 인기를 얻자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성공한 이 작품에서 두 번 나오는 대사 “ 사랑은 결코 미안하단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이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는 명대사로 꼽힌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명대사 중 13위에 올라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그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다소 진부하고 뻔한 내용의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명문가의 상속자이자 하버드대생인 올리버는 어느 날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제니와 사랑에 빠진다. 올리버의 부모는 제니가 명문가 출신도, 명문대생도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의 결혼에 반대하고 급기야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의절을 해버린다. 제니는 사립학교 교사로 취직을 하고, 올리버는  어렵게 고학으로 법대를 졸업하여 유명 법률회사에 취직하면서 드디어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찾아오려는 순간 제니가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위 대사는 올리버의 아버지 60살 생일파티에 참석하는 문제로 처음으로 제니와 다툰 후 나오는 대사이다. 제니는 어떻게든 부자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올리버가 전화통화까지 거부하며 화를 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평정을 찾은 올리버는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제니를 찾아온 동네를 헤매다가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계단에서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쓸쓸히 앉아있는 제니를 발견한다. 급히 뛰쳐나가느라 열쇠를 잊고 나갔던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제니와 올리버가 나누는 대사가 위의 첫 번째 대사이다.

결국 제니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그제서야 병원으로 찾아온 아버지와 올리버가 병원 밖에서 나누는 대화가 위의 두 번째 대사이다.

두 대사에서는 단어 하나 틀리지 않는 같은 문장이 반복되지만, 그 뉘앙스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첫 번째 대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슨 말을 했더라도 그냥 다 이해가 되니 굳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용서의 뜻으로 들린다. 반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부자간의 대화에서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아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제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지금 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될 그런 행동은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의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말을 남기고 말없이 돌아서서 황량한 겨울 거리로 사라지는 올리버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쨌든 얼핏 들으면 멋져 보이는 이 ‘명대사’가 사실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젊은 날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참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상을 좀 더 살아본 지금 나는 이 대사를 이렇게 바꾸고 싶다.

“Love means having to say you’re sorry as early and often as you can.”

(사랑이란 미안하다는 말을 가능한 한 일찍 그리고 자주 하는 것이다.)

미안해.jpg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섭섭하게 하거나 마음이 불편하게 하는 경우도 많고 무의식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종종 생기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즉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에 인색하다. 자신의 그런 행위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럴 경우도 있지만, 알면서도 쉽게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을 할 때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양해와 용서를 빈다는 뜻이므로 자신을 숙이고 자존심을 꺾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슨 이유로든 서로 다툰 후에는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쪽이 곧 지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 말을 먼저 하기가 쉽지 않다.

거의 모든 인간관계의 갈등과 불화는 의사소통의 부족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국가 간의 전쟁도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솔한 말 한마디면 서로 이해되고 용서될 것을 그냥 지나침으로 인해 오해를 낳고, 오해가 불씨가 되어 또 다른 오해를 키워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는 일은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흔히 남의 감정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 간이나 연인 사이는 너무 친밀하고 가까운 나머지 모든 것들이 당연시되어 “우리 사이에 그 걸 꼭 말해야 하나?”, “말 안 해도 알겠지.”하는 생각에 무심코 지나치거나 어물쩍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그저 약간 섭섭하거나 불편했던 감정의 불씨가 점점 커져서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주고 마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사랑이란 그 사람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배려에서 출발한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만큼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미안한 일’이 참 많이 보이게 된다. ‘그 걸 꼭 말해야 하나?’라는 생각은 잘 못 된 생각이다. 살다 보면 말 안 하면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또 설사 이미 알고 있더라도 말을 해 주면 훨씬 더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때로는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생긴 사소한 다툼 후에 금방 미안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못 꺼내는 경우도 많다. 또 속으로는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상대방이 먼저 미안하단 말을 해오지 않아서 화해와 용서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걸 알면서도 살다 보면 이 간단한 한 마디가 쉽게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알량한 자존심이 입을 여는 걸 막고 있기 때문이다.

“……   

미안하단 말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인 듯하네요.

슬픈 일이에요…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 가네요.

정말 슬픈 일이에요.

왜 그냥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거지요?

정말이지 미안하단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인가 봐요.

……

(Elton John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중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던지는 ‘미안하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 말속에는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존중의 마음이 담겨 있다.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고 어루만져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다. 그 한 마디로 모든 섭섭하고 불편한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는 ‘사랑의 묘약’과도 같은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이가 멀어지고 금이 가는 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일 때가 많다. 사랑이란 미안하다는 말을 가능한 한 일찍 그리고 자주 하는 것이다.  <산문가 나운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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